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진행 상황 (문단 편집) == 2013년 이전 == * 1998년 7월 15일, 공화당 [[도널드 럼스펠드]][* 21세기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신자유주의 군대를 추구하신 그 분. [[조지 워커 부시]] 시절의 국방장관이자 [[딕 체니]]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실세였으며, 네오콘의 핵심으로 불린다.]는 '탄도미사일 위협 보고서'(일명 럼스펠드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용은 북한이 5년 이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NMD (national missile defense)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평가는 당시 CIA 등 관계당국이 예상했던 시점을 10년 이상 앞당긴 것이었다. *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그에 앞서 <뉴욕타임즈>는 북한이 금창리에 비밀 핵시설을 만들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 로켓 추진체는 일본 열도를 훨씬 넘어 날아갔다.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위성 궤도에 안착시켰다고 하였다. 미국은 그러나 그러한 인공위성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럼스펠드 보고서는 탄력을 받고 추진되기에 이른다. 공화당 주도의 미 의회는 이듬해 99년 초 NMD 법안을 통과시킨다. * 2000년 4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였다.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된 직후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언론들은 "북한은 정말 위협적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최대의 명분으로 삼아 추진되었던 NMD에 직격탄을 날렸다. NMD는 미국 내에서 격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NMD 문제를 차기 정부로 넘겨버렸다.[* 참고로 미국 공화당의 텃밭은 미 군수산업체이다. 민주당도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 당시 NMD(National Missile Defence) 시스템의 배후에는 방위산업체의 영향력이 자리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로서 최소한 10년 먹거리가 창출된다는 것이었다.] * 2001년 1월 7일, <워싱턴포스트>는 아래와 같은 칼럼을 실었다. "MD에 대한 부시의 열망을 고려할 때 부시 행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 과정을 뒤엎을 가능성이 있다. (중략)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부정적이고, (그들은) 북한이 왜 미국이 MD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여긴다. (중략) 부시가 북한과의 협상을 중단하고 MD 구축을 선택할 경우 절망적으로 가난한 북한으로서는 군사력을 마지막 지렛대로 삼게 될 것이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784|출처]] * 2001년 2월 27일, 김대중 대통령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한러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1972년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의 보존, 강화'라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미국이 NMD망을 구축하려면, 우선 러시아(구 소련)와 쌍무협정으로 맺은 ABM (Anti Ballistic Missile) 제한조약을 개정해야 하였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략무기 제한 협상(SALT : Strategic Arms Limiation Talks)를 맺고 군축을 명분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이 러시아와 ABM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정가는 한국 바람으로 휘청였다. MD의 효용성과 군축 문제, 미국의 대외 정책을 두고 커다란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러시아 편에 서서 미국의 국가미사일 방어 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다고 미 언론은 미국 내부에 싸움을 붙였다. '뉴욕 타임스'가 선두에 섰다. 미 국무부는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일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국 외교통상부가 나서서 해명을 했다. 한국은 러시아 편을 들어 NMD에 반대한 것이 아니며, 사실은 러시아가 미국의 NMD에 반대하자고 강력히 요청했지만, 한국 정부가 거절했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며칠 뒤 워싱턴에 와서 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 [[http://weekly.donga.com/List/3/03/11/65108/1|출처]] * 2001년 3월 7일, <뉴욕타임즈>에, 클린턴 행정부 대통령 특별보좌관 웬디 셔먼은 아래의 칼럼을 올렸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북한 같은 나라의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의도는 국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은 증명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달러도 많이 들고 외교 비용도 많이 든다. 미사일 방어 시스템 구축이 논리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군비 통제 협상처럼 비용이 덜 드는 방법으로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 2001년 3월 7일~9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던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으로 지칭하여 화제가 되었다. "우리는 많은 의제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제 그 의제들에 대한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저는 북한 주민에게까지 도달한 이 양반의 리더십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but first let me say how much I appreciate this man’s leadership in terms of reaching out to the North Koreans).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0985/2|this man’ DJ의 딜레마]] 정상회담 결과, 한국 김대중 대통령과 미국 부시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 지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의 주도권 존중" 등에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한반도 문제는 당시 미 네오콘이 밀어붙이는 MD 문제에서 빗겨가게 되었다. 이후 미국 정가에서 MD는 지속적으로 힘을 잃다가 2000년대 중반 북한 미사일 실험으로 폐기 직전에서 기사회생하게 된다. * 2007년 12월 26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외교안보 브레인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는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서 "이 당선자가 외교완경 및 국내 여론을 고려하면서 MD 참여를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인수위에 참여한 [[현인택]], [[남주홍]], 김우상 교수 등이 모두 MD 참여론자에 가깝다고 알려지면서, 이 문제는 서서히 '이명박 시대 한미 동맹의 복원'의 유력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7085/5|#]] * 2008년 2월 12일, 신동아의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7085/5|이명박 정부 MD(미사일방어체제) 참여 구상 정밀분석 : 군사적 효율성 사실상 제로… 남방 3각 공고화 위한 ‘정치적 결정’]] 보도가 있었다. * 2008년 4월 8일, 서울에서 열린 이 회의에 미 국방부 동아시아 부차관보 데이비드 세드니는 "미국은 일본과 한국이 함께 하는 3자 안보협의를 열성적으로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제국 국방부 정책실장은 "안보 위협이 더욱 복잡해지고 초국적으로 변하고 있다며 더 강력한 3자 협력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다만 그는 "너무 눈에 띠면 중국과 러시아가 (한-미-일 3자 안보협력 강화에 따른) 인지된 위협에 대처하고자 중-러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9078|기사]] * 2008년 9월 8일, 서울에서 열린 SPI 회의에서 미국측은 한미 공동 MD 기구와 함께 한-미-일 3자 국방회담(DTT)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2008년 11월 4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작성한 외교 전문에 따르면, 한국측은 독도 문제를 들어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9078|출처]] * 2008년 9월 22일, 전제국 국방부 정책실장은 제임스 신 국방부 차관보에게 서한을 보내 2008년 11월에 (워싱턴에서) 열리는 3자 대화에 참석할 의사를 밝혔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9078|출처]] * 2009년 7월 16~1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3자 국방회담(U.S.-Japan-ROK Defense Trilateral Talks, 이하 DTT) 회의에는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겼다. 주일 미국대사관의 외교 전문에 따르면, 한-미-일 MD 협력 강화, 한미ㆍ미일 군사훈련에 한일 참관단 참여,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 등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서 미일 양국은 이 회의에서 미일 양국은 "DTT가 북한 문제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3자 공동의 목표와 이익을 위해 각국 정부의 능력과 전문성을 결합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이를 위해 미국측은 "진전"을 위한 세 가지 과제로 3국 군 수뇌부의 비디오 회의, 3국 정부간 협력 세미나, 한일 군부의 군사훈련 상호 참관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한미간의 사전 회의에서 화상 회의와 정부 관료 협력 세미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미일 합동군사훈련이 한국군이 참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독도 문제 등 한일간의 문제를 들어 즉답을 피하면서 한국에 돌아간 이후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결국 한일 양국은 2010년 천안함 침몰로 조성된 안보 위기 국면을 틈타 상호참관을 시작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9078|출처]] * 2011년 4월 15일, [[http://www.nocutnews.co.kr/news/824529|"한국국방연구원-美 미사일방어국, 지난해 9월 연구 약정서 체결"]]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이미 공동 연구가 한창 진행중이란 사실이 최초로 보도되어 큰 뉴스가 되었다. 시작은 KAMD이지만 결과적으로 MD와 결합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국방부는 한미 MD 협력에 대해 논의된 바는 없다고 부인했다. [[http://www.yonhapnews.co.kr/special/2011/04/15/1431000000AKR20110415142100043.HTML|출처]] * 2012년 10월 30일,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9881|MB, 결국 한국을 'MD의 늪'에 빠뜨리나?]] 하는 보도가 있었다. 이 무렵 국방부가 은밀히 미국 주도의 MD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 보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국방부는 "미국이 구상하는 MD체계는 다층방어체계로 종말단계 하층방어체계인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KAMD)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미국의 MD 참여 기준으로 (1) 지상요격미사일(GBI) 기지 제공, (2) X-밴드 레이더 설치 (3) MD 공동연구 비용 지불 등을 꼽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